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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사는 대한민국 보통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명상과 내생각

엄마가 말해준 6.25 참상 2

by 노당큰형부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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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어느 누가 보살펴 도와줄 형편도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못할 상황이 된 외길에 인적도 없는 곳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본 우리 피난민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나이 지긋한 한 남정네가 나서며 말한다,

 

"형씨 우리가 도와줄게요 얼마나 괴로워요?"

"..."

 

"숨을 끊어 줄까요?"

"..."

 

"그냥 갈까요?"

"..."

 

대답 없이 그는 푸~  푸~하고 거친 숨만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이 그의 입에 물 한 바가지를 대주어 마시게 하며

"형씨 잘 가시오..."

하며 우리 쪽을 돌아보며 말을 잇는다,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은 목이 많이 탑니다

물을 먹이면 잠시지만 괴로움은 없이 곧 숨을 멈춘답니다"

하고 계속 조심스럽게 그의 입에 바가지를 대 주고 있었다.

 

얼마나 목이 탔었는지 물 한 바가지를 다 마시더니

그 남자의 말대로 그는 바로 누워 푸우~하고 몇 번 큰 숨을 쉬더니 편안하게 자는 듯

그렇게 조용히 숨을 멈추었다...

 

주위엔 온통 파리와 모기떼가 내는 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상황

터져 나온 창자를 다시 집어넣으면 살 수 있는 것으로 알았을까?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얼마나 몸부림을 첬을까?

 

내 짧은 평생 처음으로

못 볼 처참한 죽음을 보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뒷날 두고두고 나에게 영향을 주며 强하게도 했고

때때로 惡하게도 만들어 억척같은 삶을 살게 했다.

 

이런 비극이 왜 생겼는지

이런 처절한 죽음들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한탄을 하며

우리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리를 이탈하여 이동했다,

조치원을 향하고 청주를 향하고

보은을 향하여..

 

7월 3일 피난 9일째

 

셀 수 없이 많은 생사의 곡절을 겪으며 도착한 피반령 오름길이다. 

신발은 얇고 피반령 산길은 모나고 뾰족한 자갈길이라

무거운 구르마를 끌고 가기엔 발바닥 아픔이 아주 심했다.

 

우리의 구르마는 산 비탈길을 왼쪽 오른쪽으로 갈之자 틀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조금씩 피반령 정상을 향해 나가기를 얼마 후

구르마를 틀어 잠시 세우고

 

남편은 숲으로 갔다 오며 칡넝쿨 몇 가닥을 걷어와

양발에 신발과 함께 칭칭 감아 묶고

나에겐 기저귀를 한 장 찢어서 감아 준다

얼마나 푹신하고 걷기가 편안하던지...

 

              (현재의 피반령 표지석)

 

그렇게 넘어가는 오름길에

조금 가다 잠시 멈추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조금 가다 잠시 쉬며 물 한 모금 마시고...

남편의 입과 목에선 숨을 쉴 때마다 쇳소리가 나고 있었고

까맣게 탄 얼굴은 땀이 흘러 번들거렸다.

 

이년은 그저 그 땀을 닦아줄 생각에

땀에 절은 수건을 그이에 얼굴에 비빌 힘도 부족하거늘

 

9일간의 피난길에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그만 가자거나 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그 긴 생사의 600리 길 여정을 달려와

마침내 저 아래 고향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이는 참으로 대단한 남편이며 훌륭한 가장이다.

 

남편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중간에 포기하고 여기 아무데서나 발붙이고 주저앉고 싶었다고 한다.

 

인민군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말을 잘 들으면 설마 죽이기야 하겠는가?

그러면 더 고생 않고 최소한 하루 한번 정도는 따듯한 죽이라도 연명할 것이고 잠도 푹 자고

이런 고생도 않았을 것인데...

그러나 대한제분회사에 있을 때부터 워낙 빨갱이 공산당을 싫어했던 이이니

그런 이 가 빨갱이들에게 굽신거리며 산다는 것은 생각조차 어려운 일이다.

 

이년 또한 생사를 알 수 없는 고된 피난길에 어찌할 말이 없었을까?

아무도 몰래 가슴으로 흐느끼며 울었던 순간이

죽는 것이 편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지만

남편이 약해지고 더 힘들어할까 두려워 아무 말도 내색도 못 했던 이 피난길이...

이년의 그 눈물은 땀이 되어 흘렀고 

그것을 닦아낸 애를 업은 포대기가 늘 축축이 젖어 있었던 것을

이이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아마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 더욱 힘을 내서 달려왔겠지...

 

보은군 회인면 늘곡리(늡실)은 남편의 본가이며

이년의 시집이다.

우리 네 식구가 피반령 고개를 달려와 면사무소를 지나고 삼거리를 지나

대전으로 가는 길 왼편에 외딴 방앗간이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인

늡실 영해 박 씨 집성촌

그곳에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도착했다.

 

시 어른들 식구와 한방을 둘로 갈라 안방 윗방으로 정하고

그 윗방에서 우리 네 식구가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우리 식구 피난처인 지금도 있는 늡실의 가운데 할머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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