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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사는 대한민국 보통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나의작품

그날을 어찌 잊으랴

by 노당큰형부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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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노당 큰 형부의 에세이

"노을 앞에 선 박문규의 여정"의 첫 소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다음 블로그에

한번 소개 했던 글입니다 두번 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쾅,쾅,쾅" 국방색 군복을 입은 순경으로 보이는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대문을 두드리고 전쟁이 났으니 피난을 가라고 알려왔다.

난데없이 38선 이북의 빨갱이 공산당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를 두시던 자전거포 아저씨도 놀라고 두부공장 사장님도 어머니도 놀랐다.

아버지와 자전거포 아저씨가 뒷동산 꼭대기를 다녀오시더니  

"월미도 쪽에 시커먼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이 이상해" 

 

(북성동에서 보이는 월미도. 자료사진)

 

안절부절하며 월미도 입구에 있는 직장인 제분회사로 찾아가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던 아버지

난리가 났는데 거기에 갔다가 정말 길이라도 막히면 

식구들의 안위도 문제지만

잘 못하면 헤어져 평생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그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고향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월미도에 큰 불이 났어 그곳엔 갈 수도 없어"

"문규 엄마 며칠 먹을 것 하고 이불.. 하고"

아버지는 피난을 가려고 하니 마음이 다급해지고 정신이 없다.

"김 씨 리아까(손수레) 하나 팔아요 계란 가루 하고 밀가루를 줄 테니"

 

"아 그리고 김 씨는 피난 안 가요?"

"나는 고향이 여긴데 여기서 어딜 가? 그냥 있을 거야"

 

(당시 송월동 인천기상대 모습. 자료사진)

 

평소에 우리 집에 있는 배급 물자를 가끔 사다 쓰던 김 씨는

오늘도 밀가루와 설탕을 구하고자 찾아와 아버지와 장기를 두며 놀다가

난데없이 난리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박 씨 따라와 봐 괜찮은 것 하나 있어

리아까 값으로 밀가루 1포 설탕1관 그리고 계란가루 3통만 줘요"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 리아까 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게 느껴졌지만

그나마도 안 팔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색 않고 요구한  물건들을 주고 자전거 바퀴로 만든 

리아까를 끌고 왔고

거기에 양은 솟과 이불, 곤로, 쌀, 감자 등 먹거리들을 가득 싣고 피난 준비를 마쳤다.

 

내가 태어난 송월동 기상대 밑에서

어머니가 만든 말 분(末粉) 가루로 만든 수제비로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고

김 씨와 집주인인 두부공장 사장과도 인사를 끝낸 우리 네 식구 

 

아버지는 구르마를 끌고 동생을 업은 어머니는 뒤에서 밀고

나는 구르마 뒤에 매달려 미는 둥 마는 둥 했고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의 목숨을

지키고자 허겁지겁 집도 살림도 직장도 버리고

 

충청북도 보은 아버지의 고향인 남으로 남으로

8일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처절한 피난 여정을 시작했다.

 

그때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후 2시경이었다.

 

전동 변전소 길을 지나고 홍예문을 넘어 신포동 시장 거리를 헤집고 나와 답동사거리로 방향을

돌려 그렇게 쉬지않고 언제까지 가야 할지 예측도 못하는 먼길을 한발 한발 나아갔다.

 

신작로에는 여기저기서 모여든 피난 행렬이 늘어났다.

우마차로 짐을 산더미처럼 싣고 가는 일가들도 보이고,

자전거에 집채만 한 보따리를 싣고 가는 아저씨도 보이고,

그냥 식구마다 등 보따리를 메고 가기도 하고  머리에 힘겹게

이고 가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또한 우리처럼 구르마로 살림살이를 싣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피난민의 행렬이 시간이 갈수록 자꾸 늘어만 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국방색 군복을 입은 어설픈 동작의 군인들이 하나둘 보이고

그중에 몇 명은 자기들 키와 비슷한 총을 멘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피난 민속에 숨어 같이 남으로 내려가는 공산 괴뢰군을 찾는 것 같았다.

북쪽 하늘밑 멀리 개 건너와 박촌 쪽에서는 가끔  , , 하는 포성도 들려오기도 했다

 

(그 옛날 홍예문)

 

 

답동 성당 앞을 지나 신흥 소(초등)학교 앞으로 올라가 도원 고개를 향하여 한 시간 정도 걸어갔다.

아버지가 잠시 멈추고

힘들어 하면서도 살겠다고 말 없이 따라가는 나를 번쩍 들어 구르마

꼭대기에 태우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나갔다.

 

내생 전 태어나서 이렇게 먼 거리를 쉬지 않고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첯돌때 조금씩 걸었고 워낙 나약하게 태어났지만 가벼운 만치 빠르게 걸었다고 한다

동생은 엄마 등에서 덥다고 칭얼 대면서도 나와 가꿍을 하며 심심치 않게 헤죽거리기도 하고

세상모르고 파닥거렸다.

 

얼마를 갔을까?

 

언덕 마루에 올라서서 아버지의 땀을 닦아 주며 어머니가 물을 한 바가지를 건네주고

숭의동 고개라고 한다.

왼쪽 옆에는 기찻길이 있고 오른쪽에는 초가집 몇 채만이 길옆에 있었다.

한 숨을 쉬고  초여름 했살이 뜨거운 오후 3시나 4시쯤 되었을까?

 

피난민들 사이를 헤집고 한 무리의 군인들이 오더니 피난민 대열 중에 젊은 남자들을

가려내며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고하더니 남자를 끌고 가려고 한다.

순간 주변이 술렁거린다.

 

몇몇 행렬은 못 본 척 도망 가듯 앞만 보고 재빠르게 이동하고 있고

젊은 남자에게 군인들이 가자고 하고 젊은이는 안간다,못간다 하며 큰소리가 오고 가고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아버지도 잡힐 것 같아 불안 하신지 다급히 어서 가자고 재촉하며

구르마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그들을 못 본 체하며 얼마를 갔을까?

뒤에서 세명의 군인이 아버지를 부른다.

 

"어이 구르마 양반 할 말 있으니 잠깐 거기서~ "

 

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외침이 너무 공포스럽고 서릿발 같았다

또한 식구와 구르마를 끌고 도망도 갈 수가 없었다.

군인들 중 책임자인듯한 사람이 아버지의 나이와 이름을 묻고 가족관계를 확인하고는  

 

"피난을 어디로 가십니까?"

 

"충청도요 거기가 고향입니다"

 

"그래요? 그럼 잠시 식구들 여기서 기다리게 하고 박 씨는 저희와 잠시 같이 갑시다"

 

하며 한 명이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다른 두 명은 어머니와 구르마를 초가집 그늘로 옮겨 놓는다.

이에 당황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울며 군인들에게 매달리며 애원했다 제발 보내 달라고....

 

"나는 나이도 많고 처자식이 있어서 같이 남을 수가 없어요 한 번만 보내주세요"

 

그러나 애원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들에게 선택된 이상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한참을 큰소리로 왈가왈부 생과사를 넘나드는 실랑이와 밀고 밀치는 몸동작을  벌이다가

결국은 무지막지하게 다그치는 군인들에게 끌려가며 하신 말씀,

 

 "문규 엄마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알았지? 꼭이야 울지 말고 ~"

 

그렇게 소리치고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엄마와 우리 형제를뒤에 두고 끌려가시면서

뒤 돌아보고  또 뒤돌아보고 큰소리로 외쳐 다짐 하셨다.

 

" 꼭 올게 꼼짝 말고 기다려~"

 

큰소리로 억울하다고 다투고 호소하며 소리쳐 반항 하셨기에 탁하고 칼칼한 쉰 소리로

보내 달라고 울부짖던 아버지의 처절한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여운으로 남아 있다

 

얼굴엔 뜨거운 피 눈물을 계속 흘리시며 순식간에 우리와 생 이별을 하며  아버지는

군인들과 함께 그렇게 어데 인가로 사라지셨다.

 

엄마와 우리는 낯선 그곳에서 아버지가 사라 저간 방향을  처다보며 길고 지루한 시간을

하염없이 울면서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었다.

 

1950,6,25, 새벽에

공산괴뢰 김일성은 38선 전 전선을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불법 남침하여 벌린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침략전쟁을 자행하였고.

우리 민족의 참극은 이제 시작되었던 것이다.  

 

평화로운 초여름의 일요일 우리 남한 당국은 아무 준비도 못하고 그렇게 속절없이

김일성의 마수에 당하고 말았다.

 ~ 어찌 잊으랴 1950년 6월 25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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