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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사는 대한민국 보통 사람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이것이 인생

이렇게 살았다 1

by 노당큰형부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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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병

 

12월 19일 예비사단에서 전역자 교육을 받은후  

35개월의 군 복무를 끝내고 예비군이 되었다.

 

1970년 12월 19일 전역 후

혹자는 군 제대를 하면 한 달 정도는 쉰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다.

7남매의 맏이로서 9 식구의 입을 채우는데 힘을 보태지 않는다면

어찌 힘들게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온 보람이 있겠는가?

 

놀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좋은 직장이 나오기 전 까지 임시로라도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2월 27일 군대 가기 전에 다녔던 하인천의 경북 수산 상사를 찾아갔다.

 

병역을 마치고 전역했노라고 말씀드리고

일할 곳을 찾는다고 했더니

다행히도 큰 사장님이 언제든지 오라고 하였고 바로 출근하라는 둘째 사장님의

말씀이 있어 그날로 취직이 되었다.

 

담당하는 일은 야간에 선임 사무장 선배들과 함께 

어선이 잡아온 생선류를 경매시간 전까지 운반 하역하여 경매장에 진열하고

 

주간에는 선박의 시꼬미(倭言) 주부식과 조업장비와 연료등을 선적 하고 

학창 때 이 회사 사환으로 근무하며 담당했던 선박용 윤활유를

구입 보급하는 일이었다.

 

(노당이 사환으로 근무했던 1965년 경북상회 임직원 휴가 인천 송도 수영장)

                                                                        19세 였던 노당▲

 

(경북상회 창고 앞에서 자가용 이기사 아저씨와 기념사진 

나를 편하게 대해 주는 사람은 이분 밖에 없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

신정 연휴가 끝나고 바로 출근하여 근무를 시작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고 구정이 다가왔다.

사장이 호출하여 찾아갔더니 

월급이라고 노란 봉투에 3,000원과 양회 종이에 싼 쇠고기 2근 그리고 

한 되들이 백학 정종 한 병을 주시며 아버지게 갖다 드리라고 하는데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터무니없는 월급이었다.

 

사장님에게 3,000원 월급은 너무 적다고 말씀드렸더니 

"30년 다닌 사무장도 월급이 4,000원이야 그런 사람도 아무 소리 안 해

너는 더 있다가 올려 줄 테니 아무 소리 말고 열심히 일 해" 한다

 

(여름날 하인천 수산시장 노점 풍경)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30년을 밤 낮없이 일 해온 고참 직원도 월급이 고작 쌀 두 가마 값이라니...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박봉에 시달리며 한밤에 생선을 하역할 때 감시를 한다며

값나가는 생선을 한, 두상자씩 빼어 팔아 먹었던 것이 아닌가?

 

사장은 과거부터 의례히 그러려니 하면서 묵인하고 월급을 적게 주는 것이다

한 달 여를 꼬박 회사에서 숙식을 하며  

엄동설한에도 눈보라 맹 추위와 참아내며 감시 감독하고 밤 12시부터 새벽까지는

배에서 생선을 하역하여 목도나 구르마로 경매장까지 운반했다.

 

 

그 일이 끝나는 새벽이면 

한밭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몸을 녹이고 이어 주간 근무를 하니 도무지 쉴틈이 없다.

오전 5시경 회사 야근자 대기실 온돌방에 등 깔고 늘어져 있다가

아침에 출근하는 사장 선장 사무장들이 찾으면 또 뛰어 나가 일을 해야만 한다.

직장에서 제일 막내  그러면서 신입 졸병이던 나

만만하지 않았던 

사회에서의 첫 직장 첫발을 이렇게 힘들게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어서 다음편을 바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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