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당의 저서
박문규의 여정
이렇게 살았다
2000년 12월 4일
드디어 입주하는 날,
무쏘로 흰둥이 덕실이를 실어다 수돗가에 묶어놓고
다시 검둥이(깜상)도 실어와 매어놨다.
시몬스는 마티즈로 인천 김포를 왔다 갔다 하며 바쁘게 이삿짐을 정리하고
나는 나대로 보일러 손보기 전기 손보기를 했고
그리고 광현이와 공사 미불금을 계산하고 지급해야 했다.
실평수 35평/평당/150만 원=5,250만 원 여기엔 옹벽비용
심야 전기 보일러비 등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너무 싸게 잘 지었다,
광현이가 손해는 보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중인데 200만 원만 노력의 대가로
달라고 하기에
쾌히 수락하고 후일 그 돈을 지급했다.
집을 다지어 놨더니
사람들이 우리 집을 전원주택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면서 부러워한다.
그리고 내손으로 나무, 잔디, 돌등을 정리하며 조경을 가꾸고 2~3년이 지난 후부터
나의 집은 정말 작은 전원주택이 되었다.
마당에 주차된 차와 잔디밭,
가족들이 대추를 줍는 풍경
장차 투스타(小將) 장군이 앉게 될 장군바위에서 가족들과 삼겹살오찬
2002년 12월 15일
이 집에서 큰아이를 장가보내고 알뜰하고 예쁜 며느리를 맞아
손녀와 손자를 얻었고
2010년 6월 5일
둘째 아이도 아버지끼리 만나 친하게 지내다가
그 댁의 예쁜 규수와 결혼을 했다.
나는 이 두 형제가 딸아들 구별 말고 손주를
그저 대, 여섯 명만 낳아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박문규의 정원은 내 손주들뿐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마음 놓고 즐기며 뛰어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유엔 초대 평화 유지 사령관 소장 안충중 장군(가운데)이
앉으며 장군 바위라 이름 지었다(2010,07,01)
이제 아내와 나 두식구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그날까지의 여생을 어디에 누구에게도
기대 살지 않고 살아가고자 노력 중인데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필자가 모아둔 재산이 있는 줄 잘못 알고
그동안 애 많이 썼으니 이제는 편하게(?) 쉬라는 말들을 자주 한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ㅎ
한동안 나는 대우중공업에서 자동차 영업으로 파견될 때 절망과 번뇌 속에서 그렸던 계획,
내 인생 목표인 박문규의 정원을 꾸미며
살아 나가는 중이다.
2016년 4월 23일 노당의 칠순 가든파티▼
노당의 형제들
그것은 대충 1,000여 평의 연못과 300여 평의 텃밭 그리고 700여 평의 정원엔
마구간과 양지바른 뒤뜰에 10평정 도의 가족 납골당을 만들고
마당엔 우리 가족들 차 20대쯤 주차하고
(지금은 좁아서 승용차 7~8대 밖에 주차 못하고
어떤 땐 두세 대 정도를 외부에 주차하는 일이 있다)
지하엔 손주들을 위한 4평 정도의 노래방도 있는 아담 한 30여 평의
집을 다시 한번 더 짓는 것,
이것이 내 평생 그리던 박문규의 정원인 것이다.
전편에서 말했듯이 나의 이 계획은 아내와 아이들이 반대만 하지 않으면
현재 실현 가능 하다고 믿고 있으며 시몬스에게 내 계획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박문규의 정원 두 번째 집짓기 계속..
예산 군수님 한번 와 보십시오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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